레 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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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 민제는 레 현종의 장남으로, 후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중 한 명이다. 그는 1786년 레 현종의 붕어 후 왕위에 올랐으나,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 후에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이후 찐 씨 가문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응우옌 후에의 공격으로 청나라로 망명했다.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다시 즉위했지만, 청나라 군대의 철수와 응우옌 후에의 공격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28세에 사망했으며, 사후 민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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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민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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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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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황제 |
재위 기간 | 1786년 - 1789년 |
연호 | 찌에우통 (昭統) |
시호 | 민황제 (愍皇帝) |
휘 | 레주이키 (黎維祁) 레주이키엠 (黎維[[파일:Nom Character ⿰礻兼 (2).svg|16px]]) |
선대 황제 | 레 현종 |
후대 | 떠이선 왕조의 광쭝 |
섭정 | 찐봉 (1786년–1787년) |
왕조 | 레 왕조 |
출생일 | 1765년 |
출생지 | 동킨, 대월 |
사망일 | 1793년 |
사망지 | 베이징, 청나라 |
매장일 | 1804년 11월 |
매장지 | 타인호아 반탁 마을, 베트남 |
부황 | 레주이비 |
모후 | 민황후 |
개인 정보 | |
2. 생애
레 현종의 손자이자 황태자 레 주이 비의 장남으로 태어난 레 민제는[1]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771년, 아버지 레 주이 비가 찐 군주 찐 삼에게 살해된 후 투옥되었다.[1] 1783년, 찐 카이 군주는 황태자 레 주이 컨을 폐위하고 레 민제를 레 왕조의 황태자로 임명했다.[1]
1786년,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 후에가 북부 베트남을 침공하여 찐 가문을 멸망시켰다.[3] 1787년, 레 히엔 통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응우옌 후에는 레 주이 킴을 레 찌에우 통 황제로 즉위시키고 병력 대부분을 푸쑤안으로 철수시켰다.[1][3]
찐씨 가문은 응우옌 후에가 없는 틈을 타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찐 봉과 찐 레가 영주 자리를 두고 대립했고, 레 찌에우 통은 찐 봉을 차기 영주로 임명했으나 찐 레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2] 찐 봉은 북부 베트남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지만 통치는 좋지 못했고, 혼란이 계속되자 레 찌에우 통은 응에안의 떠이선 총독 응우옌 후 추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2] 응우옌 후 추잉은 군대를 이끌고 탕롱(하노이)을 점령하고 찐 봉을 도주하게 만들었으나, 권력을 남용하여 응우옌 후에의 정치적 위상을 훼손했다.[3][4][5]
응우옌 후에는 부 반 념을 보내 응우옌 후 추잉을 격파하고 탕롱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부 반 념 역시 권력을 잡았고, 응우옌 후에는 다른 장군들을 보내 그를 진압해야 했다.[3] 한편, 레 찌에우 통은 베트남 최북단으로 도망가 응우옌 후에의 귀환 요청을 거부하고, 청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7]
건륭제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고, 레 찌에우 통은 레 왕조 충성파들과 함께 청군에 합류하여 떠이선을 몰아내고 탕롱을 점령했다. 청 부총독 쑨 스이는 레 찌에우 통을 꼭두각시 통치자로 세웠으나, 레 찌에우 통은 떠이선 지지자들에게 보복하고 백성들에게 식량을 강요하는 등 억압적인 통치를 했다.[6][7]
이러한 상황은 응우옌 후에에게 왕위를 차지하고 인기를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1788년 12월 22일, 응우옌 후에는 꽝쭝 황제로 즉위하고 레 왕조의 멸망을 선포한 후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7] 1789년 음력 설에 떠이선 군대는 청군을 격파했고, 레 찌에우 통은 중국으로 도망가 레 왕조는 종말을 맞았다.[9][8]
레 찌에우 통과 레 왕조 고위 충성파들은 청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레 찌에우 통은 한군 황색 깃발의 4품 관료로 임명되었고, 하위 충성파들은 쓰촨성과 저장성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청나라 의복을 입고 변발을 하여 청나라 신민이 되었고, 베트남의 범죄인 인도 요구로부터 보호받았다.[10][11]
전쟁 후, 응우옌 후에는 중국에 승인을 요청했고 조건부로 수락되었다.[14] 청 제국은 응우옌 후에를 베트남의 새로운 통치자로 인정하고 "안 남 국왕" 칭호를 부여했다.[14] 이후 레 치에우 통은 청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다.[15] 그는 남은 생애를 중국에서 보냈으며 1793년에 사망했다.[15]
1802년, 응우옌 왕조 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레 왕조 충신들은 가경제에게 레 치에우 통의 유해를 베트남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요청했고 황제는 이에 동의했다.[15] 가경제는 중국에 억류된 레 치에우 통의 추종자들을 석방했다.[15]
레 치에우 통의 유해는 베트남 타인호아 반 탁 마을에 묻혔다.[15] 그는 사후에 '''민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즉위 이전
레 민제는 레 현종의 첫 번째 황태자인 레 주이 비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계실 응우옌 티 옥또이다. 초명은 '''레 주이 키엠'''(Lê Duy Khiêm, 黎維--)이었다. 까인흥 30년(1769년), 아버지 레 주이 비가 찐 섬에게 폐태자가 되면서, 레 주이 키엠은 아버지, 동생 레 위 껨, 레 위 지와 함께 투옥되었다.[16]1782년 찐 섬이 사망하고 삼부군의 난이 일어나자 레 주이 키엠 등은 석방되었고,[17] 단남왕 찐 개 등 여러 신하들에게 황사손으로 추대되어 레 위 뎬을 대신하여 조부 레 현종에게 입사손되었다.[18]
2. 1. 1. 감옥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민제는 황태자 레주이비와 계비(繼妃) 응우옌씨 소생의 아들이다. 찐 주의 찐조아인은 레주이비를 총애하여 자신의 딸 찐티응옥뉴언(鄭氏玉潤)을 그와 결혼시켰으나, 찐티응옥뉴언은 일찍 죽었다. 찐조아인의 아들 찐섬은 왕세자 시절에 레주이비의 재능을 질투하여 그와의 사이에 틈이 생겼다. 찐섬은 1769년에 레주이비가 찐조아인의 궁인과 사통하였다고 무함하여 투옥하고 폐서인하였다.[36] 민제와 두 동생 레주이따(黎維䄂), 레주이찌(黎維祗) 또한 모두 수감되었다.[39]이후 민제 삼형제는 폐태자 역당의 친속이라는 이유로 13년 동안 옥에 갇히게 되었다. 1782년 찐 주에 내란이 발생하여 삼부군(三府軍)이 찐깐을 살해하고 찐똥을 옹립하였다. 삼부군은 감옥을 공격해 들어가 민제 삼형제를 석방시켰다.[39] 1771년 레 민제의 부친이 9대 찐 군주 찐섬에 의해 살해된 후, 그는 투옥되었다.[1]
2. 1. 2. 황사손 시기의 정국
민제가 태손이 되었을 때 삼부군은 교만과 횡포가 심하여 백성의 거주지에 수시로 소요를 일으켰고, 찐똥은 이를 제어하기 어려웠다. 찐똥의 측근인 응우옌칸(阮侃), 즈엉쿠옹(楊匡), 응우옌찌엠(阮霑) 등은 삼부군의 행위를 억제하고자 음모를 꾸몄으나 삼부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1784년, 삼부군은 반란을 일으켜 찐 주의 부(府)로 공격해 들어가 응우옌찌엠을 죽였다. 즈엉쿠옹은 왕태비인 즈엉티응옥호안(楊氏玉歡)의 동생이었으므로 왕태비가 재삼 간구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응우옌칸과 그의 동생 응우옌디에우(阮條), 석군공(碩郡公) 호앙풍꺼(黃馮基)는 병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으나 찐똥이 삼부군에 의해 부중에 연금되자 결국 중지하였다.[39]당시 삼부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한데다 북하(北河) 지역에 황재(蝗災)와 기아가 발생하자 농민들의 봉기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북하 지역의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39]
1786년, 떠이선 왕조의 지도자 응우옌냑이 북하 지역에 대란이 발생한 것을 알고 동생인 응우옌후에를 파견해 투언호아(順化)를 공격하게 하였다. 투언호아의 수장(守將) 팜응오꺼우(范吳俅)는 방비를 하지 않았으므로 대패하고 투항하였고, 부장인 호앙딘테(黃廷體), 응우옌쫑당(阮仲璫)은 전사하였다. 응우옌후에는 투언호아를 점령한 뒤 응우옌흐우찐(阮有整)의 설득으로 부려멸정(扶黎滅鄭)을 명분삼아 북벌군을 일으켰고, 수도 탕롱을 공격해 들어갔다. 찐똥은 도망치다가 사로잡히자 자살하니 이로써 찐 주는 붕괴하였다.[40]
응우옌후에는 응우옌흐우찐의 건의를 받아들여 현종으로 하여금 친정을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현종은 만수전(萬壽殿)에서 응우옌후에를 접견하였고, 응우옌후에에게 어의(御椅)의 좌측, 즉 원래 찐 주가 앉던 위치에 앉도록 하였으며, 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현종은 또한 9번째 공주 레티응옥헌(黎氏玉昕[41])을 응우옌후에에게 시집보냈다.[40]
2. 2. 즉위
1786년, 떠이선의 장군 응우옌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베트남으로 진격하여 찐 가문을 멸망시켰다.[3] 이듬해인 1787년, 레 황제 레 히엔 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응우옌 후에는 레 주이 킴(Lê Duy Khiêm, 黎維--)을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의 병력 대부분을 푸쑤안으로 철수시켰다.[1][3]레 민제는 황태자 레 지통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계실인 응우옌 티 옥또이다. 초명은 레 주이 키엠이었다. 까인흥 30년(1769년)에 아버지가 정도왕 찐 섬에게 폐태자가 되자, 레 위 키엠은 아버지, 동생 레 위 껨, 레 위 지와 함께 옥에 갇혔다. 까인흥 32년(1771년)에 레 위 지의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레 위 지는 교살되었다.
11년 후인 까인흥 43년(1782년), 찐 삼이 죽고 삼부군의 난이 일어나자 레 위 키엠 등은 풀려났고,[17] 새롭게 찐 씨 당주가 된 단남왕 찐 개 등 여러 신하들에게 황사손으로 추대되었으며, 레 위 껨을 대신하여 조부 레 현종으로부터 입사손되었다.[18]
까인흥 47년 7월 17일(1786년 8월 10일)에 현종이 붕어하자 이름을 레 위 키(Lê Duy Kỳ, 黎維祁)로 고치고 즉위했다.[19][20] 찐 개는 그 전 달에 떠이선 응우옌 씨에게 패배했고, 응우옌 후에는 응우옌 후우 찐에게 승룡을 맡기고[21] 남쪽으로 돌아갔다.
2. 2. 1. 응우옌후에의 지지를 받아 제위를 계승하다
레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레티응옥헌은 황사손인 민제를 싫어하여 황제로 옹립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지탄을 받자 응우옌후에에게 황사손을 황제로 옹립할 것을 청했다.[40][42] 이에 민제는 이름을 레주이끼로 고치고 응우옌후에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으며, 이듬해 연호를 찌에우통으로 고쳤다.[40][42]응우옌냑은 응우옌후에가 탕롱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북하 지역에서 할거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이끌고 탕롱으로 갔다. 민제는 백관을 인솔하여 교외로 나가 응우옌냑을 영접하였고, 응우옌냑은 찐 주의 부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그러나 떠이선 군의 향수병이 심해지자 응우옌냑과 응우옌후에는 민제의 제위를 승인한 뒤 함께 남하(南河) 지역으로 회군하였다.[43]
1786년, 떠이선의 장군 응우옌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베트남으로 진격하여 찐 가문을 멸망시켰다.[3] 이듬해인 1787년, 레 황제 레 히엔 통이 자연사하자 응우옌 후에는 레 주이 킴을 레 찌에우 통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의 병력 대부분을 푸쑤안으로 철수시켰다.[1][3]
2. 2. 2. 찐 주의 복벽
떠이선 군이 철군한 뒤, 레 민제는 떠이선 왕조가 후 레 왕조의 미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찐 주의 통치는 무너졌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컸기 때문에, 민제는 찐 주의 지지자들을 급히 불러 탕롱을 지키도록 했다. 이에 각지에서 병사를 일으켜 북하 지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중 찐조아인의 둘째 아들 서군공(瑞郡公) 찐레는 오랫동안 왕위를 노리고 있었는데, 찐 주의 옛 신하 쯔엉뚜언(張洵)과 즈엉쫑떼(楊仲濟)의 지지를 받아 자럼현(嘉林縣)에서부터 탕롱으로 들어가 점거하고, 스스로 찐 주가 되었다. 민제는 그가 자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이를 꾸짖었으나, 오히려 즈엉쫑떼는 민제의 조서를 찢고 모욕을 가했다. 이에 민제는 크게 분노했다.[43]이와 동시에 쯔엉득현(彰德縣)에 은거하던 곤군공(琨郡公) 찐봉 또한 민제에게 표를 올렸는데, 그 언사가 매우 공손했으므로 민제는 크게 기뻐하며 찐봉에게 탕롱으로 들어와 왕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찐봉은 향병(鄕兵)을 이끌고 탕롱을 공격해 들어가 찐레를 몰아냈다. 민제는 찐봉을 절제수보제영(節制水步諸營),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 곤군공(琨國公)으로 책봉하고 중임을 맡겼다. 다만 이전의 찐 주와 다르게 이때의 정사는 모두 민제가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43]
연충후(璉忠侯) 딘티엑니으엉(丁錫壤) 또한 조서를 받고 군사 2만을 이끌고 탕롱에 왔으며, 찐봉을 왕작으로 책봉하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대권을 황실로 돌려주는 데 동의했다. 민제는 이에 동의하고 찐봉을 안도왕(晏都王)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딘티엑니으엉이 석군공 호앙풍꺼와 연합해 함께 민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대권을 찐봉에게 넘기도록 하였다.[43]
이는 민제가 크게 불만을 품게 했고, 민제는 비밀리에 응우옌흐우찐을 불러 병사를 일으켜 왕을 도우라고 했다. 응우옌흐우찐은 민제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수만 명을 불러 모은 뒤 탕롱으로 공격해 들어가 찐봉을 몰아냈으며, 찐 주의 부를 불태워 파괴하였다.[43]
2. 2. 3. 응우옌흐우찐이 권력을 독점하다
1787년, 찐봉을 축출한 응우옌흐우찐은 민제에 의해 붕충공(鵬忠公)으로 봉해졌고,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에 임명되어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43] 그러나 찐봉이 축출되었어도 찐 주의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북하 각지의 장수들이 여전히 찐 주를 지지하였다. 딘티엑니으엉은 찐봉을 받들어 꾸에즈엉현(桂陽縣)에 잠시 머무르게 했고, 응우옌흐우찐은 대군을 보내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찐봉은 남쩐딘(南眞定)으로 물러났고, 팜딘티엔(范廷僐)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응우옌흐우찐 토벌을 요구하며 탕롱의 부이티뉴언(裴時潤)과 내응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부이티뉴언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응우옌흐우찐은 부장 호앙비엣뚜옌(黃曰選)을 보내 찐봉을 토벌했다. 찐봉은 크게 패하여 안꽝(安廣)으로 달아났다. 즈엉쫑떼, 호앙풍꺼 또한 병사를 일으켜 응우옌흐우찐을 토벌하려 했으나 모두 패배하고 살해당했다.[43]찐 주의 잔여 세력을 소멸시킨 후, 응우옌흐우찐의 권세는 날로 커져갔다. 민제는 응우옌흐우찐을 시기하여 내한(內翰)인 레쑤언찌(黎春治), 응오비꾸이(吳爲貴) 등과 함께 응우옌흐우찐을 불러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내한 부찐(武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하지만 응우옌흐우찐은 그 음모를 알게 되었고, 이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응우옌흐우찐은 자신의 부저(府邸)를 건설하는 등 토목 공사를 크게 벌여 그 권세가 찐 주와 맞먹게 되었다.[44]
2. 3. 나라를 두 번 잃다
1786년, 떠이선의 장군 응우옌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베트남으로 진격하여 찐씨 가문을 멸망시켰다.[3] 이듬해인 1787년, 레 황제 레 히엔 통이 자연사하자 응우옌 후에는 레 주이 킴을 레 찌에우 통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의 병력 대부분을 푸쑤안으로 철수시켰다.[1][3] 찐씨 가문의 일원들은 응우옌 후에가 부재한 틈을 타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찐 봉과 찐 레가 영주 자리를 주장하며 대립했고, 레 찌에우 통은 찐 봉을 차기 영주로 임명했으나 찐 레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2]
찐 봉은 북부 베트남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좋지 못했고, 혼란이 계속되자 레 찌에우 통은 응에안의 떠이선 총독인 응우옌 후 추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2] 응우옌 후 추잉은 군대를 이끌고 탕롱(하노이)을 점령하고 찐 봉을 도주하게 만들었으나, 권력을 남용하여 응우옌 후에의 정치적 위상을 훼손했다.[3][4][5]
응우옌 후에는 부 반 념이라는 장군을 보내 응우옌 후 추잉을 격파하고 탕롱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부 반 념 역시 스스로 권력을 잡았고, 응우옌 후에는 다른 장군들을 보내 그를 진압해야 했다.[3] 한편, 레 찌에우 통은 베트남 최북단으로 도망가 응우옌 후에의 귀환 요청을 거부하고, 청 제국의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7]
건륭제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고, 레 찌에우 통은 레 왕조 충성파들과 함께 청군에 합류하여 떠이선을 몰아내고 탕롱을 점령했다. 청나라 부총독 쑨 스이는 레 찌에우 통을 꼭두각시 통치자로 세웠으나, 레 찌에우 통은 떠이선 지지자들에게 보복하고 백성들에게 식량을 강요하는 등 억압적인 통치를 했다.[6][7]
레 찌에우 통의 행동과 청나라의 침략은 응우옌 후에에게 공식적으로 왕위를 차지하고 북부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1788년 12월 22일, 응우옌 후에는 꽝쭝 황제로 즉위하고 레 왕조의 멸망을 선포한 후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7] 떠이선 군대는 1789년 음력 설 축제 기간 동안 청군을 격파했고, 레 찌에우 통은 중국으로 도망가 레 왕조는 종말을 맞았다.[9][8]
2. 3. 1. 응우옌후에의 북벌과 민제의 도주
응우옌후에는 응우옌흐우찐이 벌인 일련의 행위를 모두 알게 되었다. 응우옌후에는 응우옌흐우찐을 정치적 기회주의자로 여겨 매우 미워했다.[43] 응우옌후에는 응우옌흐우찐이 탕롱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음을 알고 사신을 보내 푸쑤언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응우옌흐우찐은 북하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응우옌후에는 부반념을 보내 응우옌흐우찐을 토벌하게 했고, 민제는 응우옌흐우찐에게 적을 막으라고 명하였다. 부반념은 야밤을 틈타 응우옌흐우찐을 크게 격파하였고, 응우옌흐우찐은 도망쳐 탕롱으로 돌아가 민제 및 태후, 황비, 종실 등 사람들을 데리고 성을 버리고 경북진(京北鎭, 현재의 박닌성)으로 달아났다. 부반념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따라잡았고, 응우옌흐우찐을 사로잡아 살해하였다.[44]부반념이 탕롱에서 레주이껀을 감국(監國)으로 옹립하자 민제는 찌린현(至靈縣)으로 달아나 응우옌흐우찐의 옛 장수인 호앙비엣뚜옌의 영접을 받아 쩐딘(眞定)에 도착했으며, 쯔엉당꾸이(張登揆)의 집을 행재(行在)로 삼아 회복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호앙비엣뚜옌이 전투에서 패하고 살해당하자 민제는 여러 곳을 거치다 경북(京北)의 르엉장부(諒江府)로 달아나서 유신(遺臣)들을 규합해 대항하였고, 황태후 응우옌티응옥또는 까오방의 아오아이(奧隘)로 달아났으며,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45][46]
1786년, 떠이선의 장군 응우옌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베트남으로 진격하여 찐 가문을 멸망시켰다.[3] 이듬해인 1787년, 레 황제 레 히엔 통이 자연사하자 응우옌 후에는 레 주이 킴을 레 찌에우 통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의 병력 대부분을 푸쑤언으로 철수시켰다.[1][3]
응우옌 후에는 응우옌 후 추잉의 행동에 대해 알게 되자 탕롱(현재 하노이)을 공격하기 위해 부 반 념이라는 장군을 군대와 함께 북쪽으로 보냈다.[3] 부 반 념은 신속하게 응우옌 후 추잉을 격파하고 죽인 후 탕롱을 점령했다. 한편, 레 찌에우 통은 베트남 최북단으로 도망가 응우옌 후에의 귀환 요청을 거부했다.[3] 그는 레 왕조의 충성파들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모아 그의 가족을 중국으로 보내 청 제국의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7]
2. 3. 2. 청나라가 출병하여 민제의 복위를 돕다
응우옌후에는 부반념이 탕롱에서 세력을 키우자 그를 기습해 살해하고, 응오반서(吳文楚)에게 부반념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다. 후 레 왕조의 구원 요청이 청나라 남녕(南寧)에 도착하자,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와 순무(巡撫) 손영청(孫永淸)은 건륭제에게 상주하였다. 건륭제는 손사의를 파견해 안남(安南, 베트남)으로 출병, 후 레 왕조의 회복을 돕게 하였다.[45][46][47]청나라 대군 침입 소식에 떠이선 군은 크게 놀라 흩어졌다. 민제는 선남(山南)에서, 민제의 동생 레주이따는 뚜옌꽝과 흥호아(興化) 일대에서 유신(遺臣)들을 모아 청나라군에 협조하였다. 탕롱의 응오반서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 땀디엡산(三疊山, 닌빈성과 타인호아성 경계)으로 후퇴하였다.[45][46][47]
손사의는 청군을 이끌고 탕롱에 진입하였고, 민제도 탕롱으로 와 손사의를 방문하였다. 손사의는 군영에서 건륭제의 조서를 낭독하고 준비한 새수(璽授)를 민제에게 주어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하였다.[45][46][47]
2. 3. 3. 다시 나라를 잃고 청나라로 망명하다
떠이선의 응우옌 후에가 이끄는 군대가 북상하여 응에안에서 충분한 휴식과 정비를 가진 뒤, 섣달그믐과 춘절 기간에 청나라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다. 청나라군은 방비가 없었으므로 대패하였고, 청나라 장수 손사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청나라로 도망쳤다. 민제 또한 황태후와 자신의 원자 레주이투옌(黎維詮)을 데리고 진남관을 통해 청나라로 도망쳐 남녕에 안치되었다.[49] 후 레 왕조의 유신들도 잇달아 민제를 따라 남녕으로 망명했다. 민제의 동생 레주이찌(黎維祗)는 황비(皇妃) 응우옌티낌(阮氏金)을 보호하여 청나라로 달아날 준비를 하였으나 도로가 막혀 뚜옌꽝에서 유신들을 규합해 떠이선 군에 대항하다 패배하여 살해되었고, 응우옌티낌은 민간으로 유랑하였다.[51]손사의의 패전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건륭제는 크게 노하여 손사의를 양광총독 직에서 파면하고 복강안(福康安)을 대신 임명했다. 건륭제는 복강안에게 아홉 성의 병마를 지휘 감독하게 하여 다시 베트남을 정벌할 준비를 했으나, 복강안은 떠이선 군이 강대함을 알고 군사를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응우옌후에는 금화를 복강안과 화신에게 뇌물로 주고 화친을 청했다. 건륭제는 철병 건의를 수용하고 응우옌후에게 입조를 요구했고, 응우옌후에는 부장을 자신처럼 가장시켜 북경에 보내 건륭제를 알현하게 했다. 건륭제는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고, 두 차례나 황위를 잃은 민제는 하늘이 후 레 왕조를 포기하였다고 여겨 다시 지지하지 않았다.[46][51]
복강안은 민제를 초대하여 안남은 매우 덥고 때는 한여름이니 출정하기 적당치 못하며, 가을이 오면 출병하여 떠이선 왕조를 토벌하고 후 레 왕조 유신들이 선봉에 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또한 민제에게 떠이선 왕조 토벌 시 응우옌후에의 무리에게 암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변발을 하고 청나라 복장을 갖추기를 건의했다. 민제는 이에 동의하고 제일 먼저 변발을 하고 의복을 바꾸었고, 유신들도 임금을 따라 변발을 하고 의복을 바꾸었다. 이는 복강안이 건륭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벌인 일이었고, 복강안은 안남으로 출병할 계획이 없었다. 레꾸인은 이를 좇지 않아 남녕에서 수감되었다.[51][52]
복강안은 민제 일행을 기만하여 변발하고 의복을 바꾸게 한 뒤 건륭제에게 민제가 이미 나라를 되찾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중국에서 편안히 살기를 원한다고 상주했다. 건륭제는 상주를 접한 뒤 민제 일행을 북경으로 옮겨 거주하도록 했다.[52]
2. 4. 청나라에서의 망명 생활
1790년, 민제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였고, 건륭제는 그들을 한군팔기(漢軍八旗)에 편입시켰다. 건륭제는 민제, 황태후, 원자 레주이투옌(黎維禐)을 북경의 안정문 국자감 건물 곁에 안치시키고 그곳을 서안남영(西安南營)이라고 불렀다.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은 동직문 양포(羊鋪) 건물 곁에 안치시키고 그곳을 동안남영(東安南營)이라고 불렀다. 규정대로 식량을 지급하였고,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허락했다.[51][52] 건륭제는 또한 양황기의 도통(都統) 금간(金簡)을 파견해 민제에게 좌령직(佐領職)과 세습삼품관함(世襲三品官銜)을 수여하였다. 다만 민제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어 여러 차례 금간의 부저(府邸)에 가서 청나라 조정이 떠이선 왕조를 토벌하는 병사를 내어 줄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다만 이들 서신들은 모두 화신이 금간을 시켜 가로막도록 했고, 건륭제가 알지 못하게 했다. 민제에게는 각종 이유를 들어 얼버무림으로써 회피하였다. 민제는 크게 실망하여 최후에는 유신들을 이끌고 죽음을 무릅쓰고 표를 올려 청나라가 출병하여 뚜옌꽝, 흥호아 일대를 공격해 떨어뜨린 뒤 그 지역으로 후 레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해 주어 이전에 명나라가 막 왕조의 자손들을 대우한 고사와 같이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만약 청나라 조정이 응답하지 못한다면 즉시 유신들을 이끌고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자딘으로 가서 그곳을 지키는 응우옌푹아인(자롱 황제)에게 의탁하려고 하였다. 화신 등은 이전에 그들이 변발하고 의복을 바꾸게 된 진상을 건륭제가 알게 될까 두려워하였고, 이에 상주하여 이는 민제의 본의가 아니며 유신들이 뒤에서 공작을 펼친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유신들을 각지로 유배시키기를 건의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명을 내려 후 레 왕조의 수많은 유신들을 구류한 뒤 신강, 흑룡강, 길림, 열하, 봉천 등지에 안치시켰다. 민제의 곁에는 오직 팜딘티엔(范廷僐)과 딘냐호아인(丁迓衡) 두 문신만 남아 시중을 들게 되자 민제는 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고, 계속 북경에 거주하였다.[51][52]1792년, 민제의 아들 레주이투옌[33] 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오래지 않아 민제 본인도 애통해 한 나머지 병에 걸려 쓰러졌고, 이때 레후이브엉(黎輝旺)이 민제를 모시며 수고를 다하자 민제는 마침내 그를 양아들로 삼아 이름을 고쳐 레주이캉(黎維康)이라고 한 뒤 후계자로 삼았다. 이듬해 1793년에 민제 또한 사망하니 향년 28세였다. 청나라 조정은 그를 공작의 의례로 북경 동직문 밖 광릉(廣陵)에 장사지냈고, 레주이캉으로 하여금 좌령직을 세습하도록 명하였다. 1799년, 황태후 응우옌티응옥또 또한 서안남영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52][53]
1798년, 응우옌 주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지자 응우옌푹아인은 병부우참지(兵部右參知) 응오년띤(吳仁靜)을 광동으로 파견해 민제의 소식을 찾도록 했고, 그를 맞이해 귀국 및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응오년띤은 민제가 이미 북경에서 사망하였음을 알고 되돌아갔다.[54] 1802년, 응우옌푹아인이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투언호아에서 응우옌 왕조를 세운 뒤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청했다. 이에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은 표를 올려 안남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주청하여 가경제의 허락을 받았다. 민제의 생전 뜻을 살펴 유신들은 1804년에 민제, 황태후, 원자 레주이투옌 및 충신 응우옌비엣찌에우(阮曰肇), 응우옌반꾸옌(阮文涓)의 유해를 함께 안남으로 돌려보냈다. 베트남의 여러 전설에 따르면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민제의 관을 열었을 때 시체는 이미 백골만 남았지만 오직 검붉은 심장 하나만이 여전히 썩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 민제의 황비 응우옌티낌은 민제의 유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고 가서 조문한 뒤 독약을 먹고 자살해 순사(殉死)하였다. 그들의 유체는 모두 레 현종의 능인 반석릉(盤石陵)에 부장되었다.[52][55]
3. 연호
昭統|찌에우통중국어은 민제가 사용한 연호이다.
4. 평가
쩐쫑낌은 저서 《월남사략》에서 응우옌후에가 찐 주를 무너뜨린 뒤 북하 지역의 대권은 완전히 민제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립하여 대업을 이룰 수 있는 드문 기회였지만 민제의 우유부단함과 당시 조정에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다시 혼란을 불러왔고, 마침내 후 레 왕조도 무너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57]
《황려일통지(皇黎一統志)》에서는 민제가 제왕의 상을 지녔지만 제왕이 응당 갖춰야 할 소질이 부족했고, 어린 나이에 기운이 성했지만 정치 경험이 부족한데다 사람을 쓰는 데 능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 공산당 학자들은 민제가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제위를 되찾으려 시도한 것 때문에 민제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부패 무능한 꼭두각시 황제', '적군에 비굴하게 아첨하여 수치를 모르고 비열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국내 인민들에게 극도로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고 평가했다.[58]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친 | 레주이비 |
모친 | 민태후(愍太后) 응우옌티응옥또(阮氏玉素)[33][34] |
아내 | |
황후 | 응우옌티응옥투이(阮氏玉端)[33][34] |
황비 | 응우옌티낌(阮氏金) |
아들 | |
레주이투옌(黎維詮)[33][34] (대월사기전서속편에는 원자(元子)라고 칭함) | |
레주이캉(黎維康) (양자, 본명은 레후이브엉(黎輝旺))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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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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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추시
[31]
문서
응우옌 왕조 끼엔푹 황제가 추시
[32]
문서
레 현종 (27대)의 능에 부장됨
[33]
문서
민제의 생모, 황후, 황자의 이름은 베트남 사료에는 모두 기록이 없다. 베트남 사료에서는 생모를 민태후(愍太后), 황자를 원자(元子)로만 칭하고 있고, 황후는 어떠한 말로도 언급이 없다. 다만 동시기 청나라의 광서순무(廣西巡撫) 손영청(孫永淸)이 건륭제에게 올린 상주문 《奏爲査明安南國王眷屬內投、暫爲安揷並防範關隘緣由摺》에 따르면 민제의 생모의 이름은 응우옌티응옥또(阮氏玉素), 황자의 이름은 레주이투옌(黎維詮), 황후의 이름은 응우옌티응옥투이(阮氏玉端)라고 한다.
[34]
서적
청대중월종번관계연구(淸代中越宗藩關係硏究)
[35]
문서
레뜨키엠(黎思謙)으로 적은 기록도 있다.
[36]
서적
대월사기전서속편
[37]
서적
대월사기전서속편
[38]
서적
대월사기전서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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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월사기전서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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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월사기전서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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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남정편열전초집·위서열전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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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정편열전초집(大南正編列傳初集)·위서열전(僞西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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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적
대월사기전서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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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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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정편열전초집(大南正編列傳初集)·권11·응오년띤(吳仁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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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려일통지·제17회(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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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월남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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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베트남역사(越南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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